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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나향 이야기

벽오금학도 출간 즈음의 소설가 이외수

by 죽나향 202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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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얼마나 되셨어요?"
사진을 공통분모로 모인 자리에서 서로의 사진경력을 얘기할 때가 있는데, 나의 사진경력을 말할 때 가끔은 난감할 때가 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이고, 내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쯤이고, 요즘 말하는 DSLR은 2008년부터 시작했으니 상황에 따라 사진경력을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력을 일부러 줄이거나 부풀린 적은 없으나 줄여서 말했다가 훗날 늘려서 말하면 듣는 이에 따라 오해가 있을 것 같아, 그게 조금, 아주 조금 걱정이긴 했다.
보통의 경우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에 대한 대답으로는 짧은 기간을 선택해서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긴 기간을 경력으로 말하기에는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아직까지도 딱히 정해진 장르도 없이 사진을 닥치는 대로 찍고 있고,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사진 한 장 없고, 번듯한 명함 한 장 없는 입장이다 보니 한없이 겸손? 할 수밖에 없었다.
 
페이스북을 시작한 지가 약 1년이 넘었다. 누군가로부터 문자가 오면, 글을 모르는 사람처럼 한 줄의 말을 만드는데 몇 분씩 걸렸던 내가 SNS라는 것에 도전을 한 것이다. 처음은 그저 눈팅만 했고, 더러는 내 사진을 올리기도 했으며, 친구추천을 받기도 하고 요청하기도... 말도 많이 늘었고 친구도 많이 생겼고, 그중 꽤 여러 명을 오프라인에서 만나 친분을 키우기도 했다.
페이스북에는 유명인도 있었고, 유명인은 친구 숫자가 남달랐다. 정해진 숫자 이상의 친구가 생긴 유명인사에게는 더 이상 친구요청을 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페이스북에서 '이외수'라는 이름을 만났다. 내가 좋아하고 흠모? 했던 소설가 이외수를 페이스북이라는 장에서 만난 것이다. 숨죽여가며 조심해서 천천히 친구요청을 했다. 답변은 빨랐다. 자동거절메시지가..... ㅠㅠ
 
사진은 그저 찍기만 하면 좋겠다는 피사체가 있는가 하면, 남들과는 다르게 꼭 한번 찍어보고 싶은 피사체도 있고, 자랑하고 싶은 사진도 있고, 남들에게는 보여주기 싫은 사진도 있다. 잘 찍었다 생각되지만 자랑거리가 못 되는 모방사진도 있고, 남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애착을 가지는 사진이 있다. '이걸 내가 어떻게 찍었는데....' 하면서 말이다.
 
책을 즐겨하지 않던 내가 소설 '칼'에서 이외수에게 반해 버린다. 그리고는 이외수의 소설이란 소설은 빠짐없이 구입했다. 꿈꾸는 식물, 산목, 훈장, 들개, 겨울나기, 장수하늘소... 단편 소설은 대부분 중복되어도 새로운 단편 소설 하나를 위해 구입한 적도 있다. 아마도 그 단편 제목이 '고수'였을 것이다.
'산목' 상권을 읽고 이야기의 전개가 궁금하여 하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몇 해만에 엉뚱한 '벽오금학도'가 출간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집어 들었다. 1992년 5월이었다.
 
벽오금학도를 구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과 함께 종로서적을 갔다. 정확히 무슨 일로 갔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종로서적에서 있었던 일이 워낙 큰 이벤트였기에 애초 서점을 찾은 목적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었는지 아니면 어떤 안내문을 봤는지 그 건물 위층에서 '벽오금학도 출간기념 독자와의 만남을 위한 소중한 자리' - 순전히 내가 만들어 붙인 제목임 - 에 우연히 참석했다. 이외수선생님을 워낙 좋아해 한 권도 빼놓지 않고 구입, 정독 3회를 했던 마니아였던지라 아마도 소식을 미리 알았다면 새벽부터 줄을 서서 좋은 자리 잡고 기다렸을 텐데... 이때만 하더라도 인터넷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때라 이런 좋은 소식은 달리 접할 길이 없었다.
만원이다. 탁자에 벽오금학도가 총총히 쌓여있고 이외수선생님이 먼발치로 보였다. 얼굴을 본 것도 처음이고, 목소리를 들은 것도 처음이다. 그저 그 자리가 좋아 한참 동안 정신을 놓았다. 항상 들고 다니던 카메라가 내 어깨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고, 그제야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뷰파인더에 이외수선생님이 아주 작게 보였다. 너무 거리가 멀었다. 실례고 뭐고 사람들을 비집고 헤쳐나가야 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운 가운데 한참을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다가 드디어 한컷을 날려보는데,.... 지금의 디지털카메라처럼 확인이 바로 안 되어 며칠 만에야 사진을 볼 수가 있었다. 컬러 필름이었는데 그 컬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사진동아리하는 친구에게 흑백 사진으로 인화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른다. 친구 녀석에게 전화가 왔고, "사진 꼭 가지고 와야 한다!"라는 말을 몇 번을 하고는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래 사진 한 장을 얻었다.

 

1992년 종로서적에서
1992년 종로서적에서

 
위 모습은 근래의 선생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극심한 대상포진에 시달리며 벽오금학도를 완성한 직후라 많이 초췌한 모습이다.
페이스북에서 미소가 가득한 안경 낀 이외수선생님을 자주 만난다. 혹독한 투병기를 지낸 그의 미소가 매우 해맑다. 글을 읽고 나서 '좋아요'를 누른다.
 
 
위 글은 2015년 11월 3일 작성된 글입니다. 위 글을 작성 후 꽤 오랜 기간 페이스북에서 이외수 선생님의 모습과 이야기를 볼 수 있었지만, 아들 이한얼 님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일이 차츰 많아지다가 2022년 4월, 마음의 고향 춘천에서 영영 세상과 이별하고야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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