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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나향 이야기

민중서관의 옛날 영어사전

by 죽나향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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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담임 선생님이 전과목을 지도하던 초등학교 방식이 각 과목별로 전문지도 선생님이 있는 방식으로 바뀌어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던 시기이다. 또한 초등학교에서는 없었던 과목이 생겨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과목 중 영어가 으뜸임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영어 수업의 진도가 어느 정도 나아갔을 때 영어 담당 선생님은 영어사전을 가지고 와서 검사를 받으라 했다. 영어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영어 사전이 없다함은 담당 교사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 적당한 시간을 주며 나름의 숙제를 주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주신 적당한 시간의 의미는 혹여 사전이 없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니 부모님께 이야기하여 구입하라는 의도가 담겨있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나는 이 사실을 부모님께 전달하여 멋진 영어사전 하나 구입하려 했다. 하지만 "사전 있다고 공부 잘하냐? 이거 가져가라~" 그러면서 어디에서 주워왔는지 먼지가 찌든 사전 하나를 내게 건넸는데 그 녀석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숙제검사가 있던 날, 영어시간을 앞둔 쉬는 시간은 분주했다. 사전을 준비하지 못했던 친구들은 다른 반으로 달려가 사전을 빌리기 시작했고, 빌리지 못한 친구들은 난색을 뗬다. 사전이 준비된 나는 여유롭게 영어 시간을 기다렸다. 책상 위에 의기양양하게 놓인 영어사전. 하지만 사전 없는 책상도 더러 있었고, 영어는 단어 암기가 가장 중요한데 사전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며 빠른 준비를 요구했다. 준비가 안된 친구들에게 의외의 선처가 내려진 것이다. 끝나나 싶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숙제 검사가 시작되었다. 숙제를 해온 사람들만 숙제 검사를 받는 셈이다. 사실 많은 친구들이 사전을 빌렸는데 그 사실을 선생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숙제 검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 차례다. 다른 친구들의 사전에는 손도 안 대던 선생님, 내 사전을 들고 빠르게 넘기더니 "이걸 사전이라고 갖고 왔어?" 하며 사전으로 내 머리통을 때린다. 사전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존재인데 너무 오래된 사전이라는 것이다. 내가 시범케이스, 본보기가 된 느낌이었다. 창피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억울했다. 안 가져온 친구는 선처를, 가져온 친구도 다수가 옆반에서 빌린 터라 억울했다. 시간이 얼마간 지났는데도 다시 검사하는 일은 없었다. 나 역시 새로운 사전을 준비하는 노력은 없었고, 훗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야 내 사전은 준비되었다. 뒤늦은 숙제였다.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리통을 세번이나 때렸던 오래된 영어사전이 내 앞에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봐도 좀 심하긴 했다. 아버지가 쓰던 사전을...ㅎㅎ

민중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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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의 영문 글자는 금색 잉크로 프린팅된 글자가 아니라, 바탕과 구별되는 색의 비닐?을 정교하게 잘라 바탕에 붙인 것이다. 책등의 알파벳도 같은 방식으로 붙여서 만들었다. 세월 탓에 군데군데 알파벳이 떨어져 나갔다.


NEW LITTLE
ENGLISH-KOREAN
DICTIONARY

MINJUNG-SUGWAN


다 맞는 말인데 첫 단어 'NEW'가 원망스럽다.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이 흐른다해도 저 'NEW'는 뻔뻔하게도 저 자리를 지킬 것이다.ㅋㅋ

민중서관
민중서관 영어사전



워낙 오랜 세월 접혀 있었던 탓에 펼쳐놓고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펼치면 다시 접히고 다시 펼쳐도 다시 접히고. 잠시 고민 끝에 문진의 역할을 하는 물건을 찾기 시작했으니 안 쓰던 만년필이 눈에 들었다. 만년필로 고정하고 사진을 찍었다.

민중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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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의 말미에 '1956년 11월, 편집국 사전부'라고 인쇄되어 있다. 당시에는 정말 'NEW'였을 것이다.



단어를 찾아봤다.
information
통지, 보도, 소식, 정보
"잘 맞구만. 더 이상 뭐 어쩌라구!"

민중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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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이 남아 있다. 'operate'에 밑줄이 그였다. 나는 아니다. 아버지일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맞다면 저 볼펜은 모나미 볼펜일 것이다. 아버지 공부할 적에 모나미만 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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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내미는 사전이 없다. 사전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전자사전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잠깐 동안 썼으며, 조금 커서는 스마트폰을 이용했다. 입력하면 읽어주고 단어장에 기록까지 해준다. 내가 가진 책으로 된 사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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